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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_문화생활

한계선은 모두 다 다르다 부모라 할지라도-디어마이프렌즈, 킬미나우

 

스포일러 다수

 

내면의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 그런 나의 주체적 선택 혹은 성취. 최근 본 연뮤들 중 이런 주제 다루고 있는 거 꽤 많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보다 '나'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찾는 고민과 여정 자체에 포커스가 된. 이런 극의 주인공은 대부분 성소수자이거나 여성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의 삶의 방식을 강요받는 대표적인 사람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사회적인 약자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진짜 원하는 걸 추구하면서 산다고 보기는 어렵다.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와 연극 킬미나우는 특히 '부모'라는 사람들의 내면을 주목한다. 디마프를 보면 킬미 생각이 나고, 킬미를 보면 디마프 생각이 났다. 둘이 불치병과 장애인이라는 소재를 다루기 때문에 당연하기도 했겠지만. 

 

부모는 개인이라기보다는 누구 아빠, 누구 엄마라는 누군가의  부모라는 '역할'로서의 삶을 산다. 자식이 어릴때는 당연하고 자식이 장성해서 독립하더라도 자식과의 관계에서 부모는 어쩌면 영원히 부모로만 남는다. 그래서 보통 자식이 있는 부모의 자살은 비정하고 인정머리 없는 것이거나, 아예 반대로, 남은 자식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킬미나우에서 제이크는 집안의 가장이지만, 동시에 글을 쓰는 작가이고 애인도 있다는 점이 강조됨. 제이크가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도 이런 내면의 다양한 측면에서 여러 가지가 발생한다. 물론 가족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애인인 로빈에게 '이런 모습이 됐다, 더이상 너랑 섹스할 수도 없다. (그래서 연락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설명하거나, 글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 절망하는 모습들은 그가 단지 부모로서의 역할 수행에 대해서만 좌절한 것은 아니었다는 걸 보여준다. 나에게 '나'는 없어. 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나'라는 애인으로서의 모습, 작가로서의 모습이 정말로 전부 없어졌을 때에는 견딜 수 없어지는 거지. 죽음의 이유 중에 비중이 어쨌든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 즉 '누구 아빠'에게는 흔히 기대되지 않는 욕구들이 좌절되었다는 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오로지 자식뿐이었던 건 아니라는 것. 그런 부분을 조명한 게 좋았다. 이게 참 킬미를 보고 나서 후기를 쓰는 지금은 당연한 건데... 그 이전까지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디마프 초반에 희자(김혜자)가 자살하려는 장면에서 킬미나우가 떠오른 건 제이크와 희자 두 인물이 비슷한 심정이었기 때문일 것임.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집에 혼자 남지만 전구도 혼자 갈 수 없을 만큼 자신은 무지하고, 약해졌으며 망상증까지 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 이러다 치매까지 걸리게 된다면 자식에게 민폐인건 둘째치고 아마 혼자 깔끔하게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희자가 자살하러 가는 길은 매우 '보통날'스럽게 깔끔하고 따뜻했고, 자식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나 미안함이 발목을 붙들지도 않았다.

 

디마프와 킬미를 보며 든 이런 생각들은 치매를 앓던 할아버지를 결국 보내면서 든 생각과 비슷하기도 했다. 처음 겪는 가까운 집안 어른의 병환이었고 치매가 그렇게 무서운 병인지도 처음 알았다. 할아버지는 화가였는데 치매에 걸리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붓을 들기는커녕 작업실이 어디 있는지도 새까맣게 잊었고 병을 진단받을 때쯤에 벽에 걸려 있던(할아버지는 벽에다 한지를 핀으로 고정하고 그림을 그렸다) 수묵화는 단 한번의 붓질도 더 받지 못하고 반만 그려진 채로 남았다. 사람이 치매에 걸려도 최근의 기억부터 지워가서 옛날 기억은 남는다는데 할아버지는 태어난 이후로 전혀 그림이란 걸 그려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평생 그린 그림만 몇십장이고 평소에 그림 외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손녀에게조차 무심할 정도였는데 병이 그렇게 무서웠다.

 

만약에 병에 걸리기 전의 할아버지가 병에 걸린 후의 당신을 봤다면 그 상태로 오래 살고 싶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호흡기를 떼면 당장 죽는 몸이지만 그냥 가족들이 의지할 대상으로만 남아서 몇 년이고 살고 싶었을지... 난 잘 모르겠다. 나보다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어른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무의미하고 무리한 치료는 일찌감치 접고 오로지 할아버지가 편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내가 저렇게 되면, 병원에 오래 둬서 치료하지 말고 요양원에나 빨리 넣어라. 할머니나 어른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비슷한 말을 했다.

 

혼자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좋아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할 수밖에 없을 때. 치매에 걸렸을 때 또는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여기까지가 한계다, 라고 그어 놓는 선은 제각기 다 다르다. 부모라 할지라도. 반드시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자식을 위해서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최대치 밖에 선을 그어놓을 필요는 없다. 자살을 예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남을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삶을 떠나는 이유가 오로지 자식을 위해서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