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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_문화생활

D에게 보낸 편지(Lettre a D), 앙드레 고르

 

 

카테고리는 어쩐지 섞여있다

Analogue_Diary + Review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자였던 앙드레 고르.

아내 도린이 불치병에 걸리자 일을 그만두고 20여 년간 그녀를 간호하다 2007년 동반 자살한다.

'D(도린)에게 보낸 편지'는 2006년 3월부터 6월까지 쓰였다.

1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얇은 책.

아마 처음 보면 시집인가 싶을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의 구절들.

아름다운 글이란 솔직하고 간결하다.

어떤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마음이 충분히 전해지는 것이다.

 

 

 

 

고르는 책에서 도린과 살아온 58년여 해를 서사적으로 기술한다.

중간에 조금 지루하기도 한데(이게 편지임?; 자서전 아니냐 싶기도)

다시 생각해 보면 그의 인생에서 도린을 빼놓을 수 없었다.

부부는 언제나 함께였으니까.

책의 부제도 '어느 사랑의 역사'다. 둘이 함께한 역사이니, 그 역사는 남편의 역사이자 아내의 역사이다.

어떻게 읽더라도, 어느 한 쪽의 자서전으로 읽힐 수 있게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앙드레 고르는 현대인의 기준에서 좋은 남편감은 아니다.

보통 안정적 밥벌이가 가장 중요한 마당에 그의 직업은 철학자이며, 한 논문을 몇 년째 붙들고 있다.(사르트르는 나중에 심지어 출판 못하겠다고까지 한 논문을!)

유대인이고, 가난하다.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드라마 소재로 쓰이거나 자기계발서 비슷한 성공스토리에 쓰일 법한 남주인공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이'다. 이들의 결혼생활이란.

 

 

 

 

젊은 시절 아내와의 연애같은 결혼생활.

그러나 고르는 돌이켜보니 그땐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한다.

심지어 그의 책 '배반자'에서 아내를 자신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자로, 자신은 그녀에게 사랑을 베푼 것처럼 묘사했노라고 말한다.

고르는 말한다. 나는 그저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라고.

 

어떻게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았다니.

이는 아마 소중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닐까.

 

 

나는 더 이상-조르주 바티유의 표현을 빌리자면-'실존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 남편은 이런 멘트(!)를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겠다고.

정말로 도린을 위해서 하루하루 충실히 그 마음을 바치겠다고 말이다.

 

늙은 철학자의 사랑은 세월이 갈수록 성숙해진다. 더욱 깊어지고 새로워진다.

늙음이란 단지 연인을 위하는 사랑의 기술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자살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한 쪽이 죽어 없어진 이후에는 나머지 한 사람의 삶도 의미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옛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랬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죽은 후에 남아 있는 아내나 남편이 자신 대신 잘 살아주길 바란다. (혹은 재혼하라고 권하기도 하잖은가)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 다시 새 삶을 살겠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은 무리였을까 했으나,

D에게 보낸 편지 속엔 오로지 도린만이 고르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노령기에 찾아오는 무기력함 때문에 선택하는 죽음이 아니라 그저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은 사랑의 습관의 발현일 뿐이었다.

그들은 정말 서로의 반쪽이었던 걸까.

월하의 노인이 붉은 실로 이어주었다든지, 신이 천상에서 인간을 반죽할 때 원래 하나의 반죽 덩어리였다든지.

 

 

 

 

 

 

 

이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읽고 나니 다시금 사랑을 꿈꾸게 된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나는 거듭 같은 사람과 다른 사랑에 빠지길 바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40대의 애인을, 50대의 애인을, 60대의 애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당신들은 만나기만 하면 틀림없이 사랑에 빠지는 운명이라고.

익숙한 사람도 마치 처음 본 듯 그렇게, 매 순간 첫사랑처럼 풋풋하고 절실한 마음의 교환을 해보고 싶다.

조건을 따진다거나 밀고 당긴다거나 하는 것은 그만 잊고 싶다.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생각하고 싶지 않다.

 

 

 

 

 

 

 

 

 

더욱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던 표지사진과 마지막 장의 사진의 대비.

이런 사랑, 정말로 있구나 싶다.

D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에 관한 '실증'이다.

막장드라마가 난무하는 시대다. 우리는 얼마나 더 사랑을 불신하고 매도할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