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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다음날_일상다반사/소롱의 생각

덕후라서 다행이야

 

 

이 단출한 혼자만의 밥상을 차리고선 그 앞에 앉아 눈물을 한바가지 쏟았다. 발단은 소세지볶음. 30분간 서서 딱 하나 만든 반찬인데 인간적으로 너무 맛이 없다. 애초에 고기류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먹어보겠다고 장바구니에 넣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자취하는 동기와 같이 장보러 나섰다가 1+1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그냥 볶기만 하면 되는걸 이렇게까지 망할 수가 있나? 나 진짜 요리 못한다... 이런 일련의 생각이 괜히 이 때깔만 좋아 보이는 망친 요리가 나 같다는 데까지 미쳐 먹으면서 눈물을 주륵 쏟았다.

 

직장인은 홀수 년도마다 슬럼프가 온다더니, 건강 망쳐가며 머리 싸매고 공부해서 따낸 자격증인데도 3년쯤 일하자 못 견디게 일이 물렸다. 마침 이직의 기회가 생겨서 덜컥 중고신입으로 입사했는데, 그만 경력과 전혀 상관없는 부서로 떨어지게 됐지만 나는 천하태평이었다. 난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어. 여러 일을 경험해 보면 좋지 뭐. 좋은 회사(라고 다들 말을 하)니 뼈를 묻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본가에다가는 회사 주변으로 가겠다고 독립까지 선언했다.

 

결론적으로 지금 본가에서 나와 (은행이 빌려준) 내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험난했다. 일단 집을 구하는 것조차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월간 고정비용을 줄여 보겠다고 월세 대신 전세집을 찾아 나섰지만 서울의 집주인들이 그렇게 만만할리가. 손바닥만한 평수 주제에 마지막까지 10만원도 깎지 못한 전세 보증금 때문에 결국 집을 빌려주실 은행님을 찾아 이틀 간 점심식사를 포기하고 회사 주변 지점들을 맴돌았다.

 

자격증 대출은 쉬울 줄 알았는데, 어린 나이만 믿고 프리랜서 타이틀만 달아 놓고 탱자탱자 놀다가 다 늙어 재취직했다 보니 그간의 소득이 도무지 전문직이라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수준이라 '저에게 돈을 빌려주시면 틀림없이 갚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서류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저축? 저축이 어딨냐 한달에 관극을 20회씩 했는데.ㅋㅋㅋㅋㅋ 이쯤에서 남탓 좀 한다. 이게 다 모범생들 때문이다. ㅋㅋㅋㅋㅋ 내가 강도를 만나도 두렵지가 않아요. 내 집을 털어봐라 떡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나오는건 티켓과 빚뿐임.ㅋㅋㅋㅋㅋ 뭐, 탈덕하고 그 티켓값 다 모았다 쳐도 집 사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매달 은행에 내는 이자는 좀 줄어들었겠지.(먼산) 

 

한편 회사에서는 신입사원 교육 과정 중에 매일 시험을 봤는데, 안 하던 공부를 그것도 전혀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려니까 정말 못해먹겠더라. 성적은 바닥을 기었고 월급 받고 하는 공부가 성적이 안나오니 진짜 환장할 거 같았음.ㅋㅋㅋㅋ 회사에서 잘 하려고 이사까지 결심했는데 이사도 안되고 이사 신경쓰느라 회사 공부도 못하다니 이 무슨 밥벌이의 아이러니냐. 이쯤 되니 스트레스 받으면 밥을 못 넘기는 심인성 위염이 도져 체력은 떨어지고 체력이 안되니 공부는 또 뒤처지고 아주 대환장쑈임.

 

그런 상황에서 어찌 겨우겨우 이사까지 마치고 새 집에서 첫 출근을 했는데. 회사에서 개인 발표를 또 말아먹었고, 돌아온 저녁에 만든 첫 요리까지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내가 눈물이 나 안 나. 울고 싶은데 오기로 참고 있던 게 그놈의 소세지볶음 때문에 펑하고 터져버렸다. 나는 요리를 싫어하고 소질도 없고, 소세지도 싫어한다. 그런데도 괜히 붙잡고 시도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안 하는 게 훨씬 낫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잘 되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충동구매까지 하고 산 것까지도 망쳐버리는 이 상황이 어쩌면 지금의 내 사회생활 같은 거 아닐까? 그냥 잘 하는 원래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어울리지 않는 순간의 욕심 때문에 나보다 훨씬 어린 생신입들 사이에서 아등바등하며 나이들고 능력없음을 증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적어도 본가에 있으면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 텐데 괜히 가족들을 떠나온 건 아닐까? 맛없는 밥을 뜨며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고 나니 문득 방 안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혼자서 좁은 방안에서 이러다가 우울증에 걸리는 건 아닐까. 어서 즐거운 일을 생각해야 돼. 내가 가장 잘 아는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 뭐가 있지, 뭘 하면 좋을까.

 

그것은 너무 당연하게도 덕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 관극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인식하자 어깨가 탁 풀렸다. 나는 이렇게나 어이없이 단순한 인간이다. 물론 다른 방법들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들어왔다. 일어나서 그릇을 뽀득뽀득해지도록 설거지 했고, 식은 요리는 미련없이 버렸고, 이 글을 써야겠다 생각했고, 내일 지인을 만나서 맛있는 걸 먹어야지 생각했고, 대학로에서 먹었던 끝장나는 티라미수를 생각했고, 필라테스를 다시 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계획들을 줄줄이 소세지처럼(너 왜 하필 자꾸 소세지 얘기를 하는거야!!!ft.올리버) 끄집어내는 게 관극에 대한 그리움이라니, 과연 덕후를 구원하는 제1메시아는 덕질이로다. 아마 얼마간 또 견딜 수 있을 것을 나는 안다.  

 

그나저나 안그래도 우울해서 더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당을 충전하고자 굳이 요리까지 한 거였는데 먹다가 우울게이지 만렙 찍은 게 너무 개그였는데, 그 망한걸 얼마간 또 꾸역꾸역 먹고 나니 그것도 포도당이라고 맘이 쾌적해졌다. 인체는 신비로울 정도로 단순하군. 자취 1주차가 이렇게 지나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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