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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리뷰_문화생활/책과 영화 그리고

[책] 생리공감_김보람

 

 

 

흰색 암컷 말티즈를 키우고 있다. 당숙 이모는 그 개를 우리 가족이 예뻐하자 별 미련없이 줬다. 개는 우리 집에 와서 얼마 오지 않아 생리를 시작했다. 중성화시키지 않은 암컷 개는 처음 키워 봤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품종견은 대부분 유전병을 가지고 있는데, 말티즈의 경우는 중성화시키지 않으면 나이들수록 피부와 안구 질환으로 고생이 심해진다고 했다. 얼마 안 가 동물병원에 찾아가 수술 날짜를 잡았다. 개는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다. 자궁 없이. 

 

주변에 친한 수의사와 사람 의사(?)가 한 명씩 있다. 각각에게 물어 봤다.

"사람도 개나 고양이처럼 자궁을 들어내면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둘 다 아무 말도 없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을까? 2013년에 생리컵을 구매하면서 나는 아마 이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좀 나을까? 아니 제발 이건 생리대보다 나아야 해. 신림동에서 공부하면서 극도로 쌓인 스트레스만큼 생리혈은 흘러넘쳤다. 정말 말 그대로 콸콸 흘러넘쳤다. 심할 땐 울컥 하는 느낌에 화장실에 가면 손바닥만한 핏덩이가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너무 무섭고 실제로 너무 힘들어서 독서실만큼이나 자주 병원을 들락거렸다. 아무것도 진단되지 않았다. 생리혈의 상태가 스트레스와 직결된다는 건 5년이 지난 최근에야 알았다. 생리를 시작한 지 16년 만에야 평소의 스트레스를 관리해야 생리기간의 몸상태도 조절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고시공부는 엉덩이로 하는데, 생리 기간엔 오래 앉았다가 일어나면 생리혈이 한번에 흘러 속옷이 피범벅이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불안해서 생리기간엔 공부가 안 됐다. 흔히들 질에 무언가 넣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탐폰과 생리컵 사용을 꺼린다지만 그 때의 나는 내 질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보다 시험에 떨어지는 게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생리컵은 도무지 친해질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기엔 당시 주변엔 생리컵은커녕 탐폰 쓰는 사람도 없었다. 제대로 넣는 방법을 몰라서 늘 걸린 듯한 느낌에 아팠고 생리혈은 줄줄 샜다. 결국 3개월 정도 씨름하다가 포기했다.

 

결국 산부인과에 가서 생리를 멈추는 피임약을 처방받았다. 이름은 잘 생각 안나는데, 과다생리 증상을 치료하는 약이었다. 이 약을 먹으면 생리기간에 갈색 냉 정도만 보인다. 생리를 안하니 이것이 바로 사는 것이구나 싶었다. 세상 쾌적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내과에 가니 당장 복용을 끊으라는 불호령이 내려졌다. 어릴 때부터 간이 좋지 않았는데 호르몬제 장기복용은 독이라는 거였다. 눈물을 머금고 약을 끊었다. 6개월 정도 지나고 시험에 합격하자 생리 양은 공부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상당히 많아졌다. 지금도 철분제를 달고 산다.

 

여초 인터넷 게시판엔 생리 기간을 깔끔하게 넘기는 팁이 왕왕 올라온다. 오버나이트 대신 아기 기저귀, 휴지 말아 끼우기, 노인용 입는 팬티, 성능 좋은 혈흔 제거제..... 그러나 '생리만을 위한' 제품은 보기 힘들다. 발암물질 나온 제품이 버젓이 다시 진열대에 올라오는 세상이다. 투쟁하고 연구하는 것은 생리하는 여자뿐이다. '생리 공감'은 그런 발걸음을 같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난 초경 이후 줄곧 생각했다. '정말 나만 이렇게 힘들어? 이 짓을 어떻게 몇십년을 해?'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 힘들었던 것이다!

 

생리를 좀더 편하게 좀더 덜 괴롭게 보내려는 노력은 여성들 모두가 하고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이고 공유되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했을 뿐. 그런 점에서 용기를 얻었다. 최근의 나는 지쳐 나가떨어져서 그저 생리 2일차가 주말에 끼기만을 바라고 있으나, 저 밖에 포기하지 않고 연구하는 자매들이 있다는 점에 큰 위안을 받았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생리용품이 있었다. 나아질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생리 공감'의 소재는 여성들의 생리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으로 확장되어 있지만, 기존의 '사이다 서사'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여성혐오가 '왜' 일어나는가, 어떤 사례가 있는가 하는 사례 분석과 공유보다는 '여성의 몸'에 집중하고 있다. 내 포궁이 낮은 편인지 높은 편인지, 어떤 생리용품이 있고 작가가 써보고 실제 어떤 불편함과 편함을 느꼈는지, 예전엔 어떤 용품을 사용했고 선진국에서는 어떤 용품을 선호하는지, 생리기간에 관계를 하면 안된다는 미신은 진짜인지... 하룻밤만에 다 읽어내려갔다. 불쾌함보다는 좀더 공부하고 시도해봐야겠다는 의욕이 남았다. 외부의 여혐에 대응하는 것도 좋지만 내 몸 공부를 해야 내 몸에 대한 혐오에 대응할 수 있다.

 

다만 여성 청소년을 '청소녀'라고 칭한 데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여성 청년을 청녀라 하지 않고 중년 여성을 중녀라고 하지 않는데 왜 청소녀라는 단어를 굳이 만들어 쓴 걸까? 소년과 소녀의 구분 때문일까? 청소년은 청년이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을 지칭하는 남녀 구분 없는 단어이다. 구분해서 청소녀라는 말을 쓰는 순간 청소년의 디폴트값은 남성으로 설정된다.

 

나는 여전히 생리기간이 싫다. (사실 생리기간을 좋아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여전히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몇달 전 여행 때문에 먹은 피임약 탓에 두 달째 부작용으로 생리통을 앓고 있고, 새로 구입한 생리대 적응에 실패했다. 하지만 여전히 시도하고 있다. 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생리대나 탐폰을 조금 사 와서 써 본다. 다음 달부터는 새로 출시되는 생리컵의 테스터 활동을 할 것이다. 시도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친한 지인은 영구 피임 시술을 고민하고 있다. 다양한 생리컵을 쓰는 지인들도 점점 늘어난다. 여성들은 '생리 공감'을 하며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