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고등학교 때 읽었을 거 같은데 보면 또 낯설다. 너 참 낯설다.
1934년 이른바 인텔리 계층이 급증하면서 나타난 무력감 및 실업 문제를 제기한 소설.
ready-made 인생.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생각난 건 나뿐인가.
"그렇지만 지금 조선 농촌에서는 문맹퇴치니 생활개선이니 합네 하고 손끝이 하얀 대학이나 전문학교 졸업생들이 모여오는 것을 그다지 반겨하기는 커녕 머릿살을 앓을 것입니다. 농민이 우매하다든지 문화가 뒤떨어졌다든지 또 생활이 비참한 것의 근본 원인이, 기역 니은을 모른다든가 생활개선을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조선의 지식청년들이 모두 그런 인도주의자가 되어집니까?"
인텔리... 인텔리 중에서도 아무런 손끝의 기술이 없이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졸업증서 한 장을 또는 조그마한 보통 상식을 가진 직업 없는 인텔리... 해마다 천 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뱀을 본 것은 이들 인텔리다.
부르즈와지의 모든 기관이 포화상태가 되어 더 수효가 아니 느니 그들은 결국 꾀임을 받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리우는 셈이다. 개밥의 도토리다.
인텔리가 아니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정조 대가로 임금 이십 전을 부르는 여자...
방금 세상에는 한 번 정조를 빼앗긴 것으로 목숨을 버려 자살하는 여자도 있다. 그러는 한편 이십 전도 좋소 하는 여자가 있다. 여자의 정조가 그것을 잃었다고 자살을 하도록 그다지도 고귀한 것이라면, 이십 전에라도 팔겠소 하는 여자가 눈을 멀끔멀끔 뜨고 있는 사실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또 정조를 이십 전에도 팔겠소 하는 여자가 있도록 그것이 아무렇지도 아니한 것이라면 그것을 한 번 빼앗긴 때문에 생명을 내버리는 여자가 있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 두 여자가 모두 건전한 양식의 소유자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무라기로 들면 차라리 정조를 빼앗긴 것으로 자살한 여자를 나무랄 것이지 이십 전에 팔겠소 하는 여자는 나무랄 수가 없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식인 걸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더 가치있다는 말일까 싶다. 또는 당대의 달라진 정조관념인가.)
P는 결국 아홉 살배기 아들 창선을 학교도 보내지 않고 공장에 다니도록 해 버린다. 공부 해 봤자 소용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1930년대 중반의 인물인 P의 결론은 현대 지성인들이 느끼는 딜레마와도 연결되어 있다. 대학 4년제를 졸업하기까지 드는 돈이 억대를 훌쩍 넘는 요즘, 대학 아니 대학원까지 마친 젊은이들의 월급 평균은 88만원. 그것도 비정규직. 학력 인플레이션의 결과는 허무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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